사회

[스크랩] 신지호의 거짓말, 신지호는 아직도 음주중인가?

다이스 선장 2011. 11. 6. 12:34

신지호는 역시 친일파 앞잡이 뉴-라이트 출신 답다.

신지호가 박원순후보의 가족사가 거짓말이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신지호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가지고 나온 자료들을 보면 대부분 일본 측 자료이거나 친일부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료들을 가져와서 역사왜곡까지 하고 있다

 

 

[신지호 "강제징용은 거짓말..가족사까지 조작]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111011103340495&p=yonhap 

 

 

그런데 신지호가 친일사료들을 가지고 나와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기업체 모집,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식이었다"면서 "박 후보의 할아버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 주장이며,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의 징용영장을 대신할 것 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이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응모해서 간 것 처럼 왜곡 한다.

 

역시 친일앞잡이 뉴- 라이트 출신 이다.

일제감정기 동안 강제징집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원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연합뉴스 기가회견 일부내용.

신 의원은 "초기에는 일본이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해 국민징용령을 강제시행하지 않고 비행기부품 및 제철용광로 제조자, 선박수리공 등 특수기능을 가진 사람들을 일본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것도 일본 회사 중심의 노무동원 계획에 따른 것 이었다"면서 "1944년 8월8일부터 비로소 일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징용령이 적용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기업체 모집,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식 이었다"면서 "박 후보의 할아버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 주장이며,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의 징용영장을 대신할 것 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친일부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령에 대한 서술과 똑같다.

 

 신지호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제시한 자료를 보자. 

[부산 고등법원 제5민사부 판결문(사건번호 2007나 4288)] 자세한 판결문 내용은 http://blog.daum.net/49-law/6014214

법원은 이 판결문에 인용한 사료를 보자면 일제에 의하여 왜곡 된 문서와 친일부역사학사료를 가지고 나와서 판결한 내용이다. 

 

 

그러나 제일동포 박경식 선생이 쓴 ‘조선인 강제 연행 의 기록’이란 책이 출간되고 나서자,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그동안 알려진 ‘국민징용령’이 일제강점기동안 만들어진 왜곡 된 문서이며 친일부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료였다는 것이 들어나면서 이전까지 나온 사료가 왜곡 된 사료이었다고 판단한다.

 

재일사학자 박경식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한 책이다

 

 저자 박경식

1922년 조선에서 태어나,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9년 동양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 중ㆍ고급학교, 조선대학교 교원을 역임하면서 조선근대사를 연구하였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희생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전역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생존자의 증언을 모으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펴냈다.

 

책머리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의 실상을 밝힌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재일사학자 박경식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한 책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이 맺어진 해, 저자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해 항의하고,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식민지 노예로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공개한다.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시절에 저자는 강제연행 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직접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를 조사하였으며, 조선인 징용자 및 목격자를 만나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해방 전후 일본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겪은 재일조선인 1세대의 입장에서, 각종 노역으로 혹사당하고 종전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 

 

 

1965년 첫 출간 이후 일본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상처의 기록,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의 역사


“이 책은 이른바 한일유착의 시초가 된 ‘한일조약’체결(1965년)을 강행하려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출판됐고, 나는 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당시와는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조선 민족에게나 일본 국민에게나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에 대한 규명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사상적 근원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조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그것에 관한 저서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책에 대한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에 증쇄하게 되었다.” -박경식(1978년 1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재일사학자 박경식은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썼다. 당시 일본 미래사未來社에서 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은 아직 식민 시대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와 조선인 징용자, 목격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한 것으로 광산채굴과 산림벌목, 각종 빌딩 건설 및 군수산업에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공개한다.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한다.

“나는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리기 위해,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통해 제국주의 침략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또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자의 사상적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과 일본의 우호친선과 진정으로 평등한 국제 연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박경식(1965년 5월)


재일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거목 박경식,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일
일본에서 더 유명한 박경식은 강제연행에 대한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1922년 경북 봉화군의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고학으로 42년 초등교원 자격을 취득한 ... 

1965년 첫 출간 이후 일본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상처의 기록,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의 역사

“이 책은 이른바 한일유착의 시초가 된 ‘한일조약’체결(1965년)을 강행하려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출판됐고, 나는 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당시와는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조선 민족에게나 일본 국민에게나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에 대한 규명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사상적 근원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조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그것에 관한 저서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책에 대한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에 증쇄하게 되었다.” -박경식(1978년 1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재일사학자 박경식은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썼다. 당시 일본 미래사未來社에서 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은 아직 식민 시대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와 조선인 징용자, 목격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한 것으로 광산채굴과 산림벌목, 각종 빌딩 건설 및 군수산업에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공개한다.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한다.


“나는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리기 위해,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통해 제국주의 침략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또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자의 사상적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과 일본의 우호친선과 진정으로 평등한 국제 연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박경식(1965년 5월)


재일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거목 박경식,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일
일본에서 더 유명한 박경식은 강제연행에 대한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1922년 경북 봉화군의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고학으로 42년 초등교원 자격을 취득한 후 대용교원(준교원)으로 전전하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던 탓에 귀국길에 오른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됐다. 이듬해 12월 미점령군 총사령부가 재일조선인 귀국 수송사업 중지명령을 내리면서 결국 일본에 잔류하게 된다. 귀국이 좌절되자 동양대 사학과에 편입, 날품팔이 등으로 학업을 마치고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중?고 교사생활을 거쳐 조선대 교원으로 부임했지만,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분파주의로 비난받으면서 70년 학교를 휴직한다. 이후 조총련과 결별한 박경식은 왜곡된 재일조선사연구의 방향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다. 자신은 헌책방을 운영하고 부인은 삯바느질을 할 만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40여 년에 걸쳐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사료를 수집했다.

 

1976년 재일조선인 운동사연구회(기관지‘재일조선인연구’)를 결성한 후, 꾸준히 일본 전역에서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연구회를 가졌으며 그 결과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루는 일본 시민단체도 생기는 등 일본에 재일조선인 문제를 인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일본에서 출간된 ‘근대일본사회운동사인물대사전’에 조선인 운동가 1,250명을 수록한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평생 수집한 자료(1300박스 분량의 4만 점의 자료)는 일제시대 각종 사회통계와 운동상황, 지배정책 등을 망라한 것으로, 일본의 시가滋賀현립대학에 기증했다(시가현립대학에는 ‘박문고’라는 이름으로 박경식의 자료만을 모은 자료실이 따로 있다).

 
박경식은 해방 전후 일본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재일조선인 1세대로, 해방 후 눈뜬 민족적 자각을 계기로 평생 재일조선인의 민족 주체성 확립과 위상 정립에 혼신을 다했다. 재일동포 2, 3세를 위해 죽는 날까지 재일동포사를 기록한 역사자료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는 그의 마지막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1998년 도쿄 자택 근처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많은 일본인은 일제의 죄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한 짓이지 자기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유태계 독일인 주부는 “많은 독일인이 이제 와서 ‘그 일은 나치가 한 일이다, 나는 나치가 싫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나치를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또 설령 정말 나치를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인이라면 독일의 이름으로 한 행위에 대하여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본문 48p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일본서 출간한 지 43년 만에 정식 계약하여 한국에서 출간
‘철도의 침목 하나에 조선인 하나’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혹사당하고서도, 종전 후에는 보상금은커녕 밀린 임금도 못 받았으며, 조국으로 귀국하지도 못한 채 아주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 받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실상을 밝힌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출간 당시 일본지식인 사회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1965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이후 지금껏 쇄를 거듭하며 판매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출간은 많은 재일조선인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고, 일제 재일조선인사의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의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선 출판되지 않고 있다가, 책이 나온 지 43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계약하여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한류열풍이 불고 한국과 일본은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걷고 있는 듯하지만, 분명 양국 간엔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존재한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그 증거이며, 이는 일본과 한국 모두 간과해선 안 될 문제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으로 잊힌 역사와 재일동포를 기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길 바란다.

 

 

다른 사례 한가지 첨부한다.

138명 탄광노동자 바다 밑에 잠든 사연

 태평양 전쟁을 앞둔 일제는 1939년 7월 국민징용령을 내렸다. 일제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조선노동자 내지(일본)이주’를 조선총독부에 지시했다.
조선총독부는 ‘모집’을 빙자한 강제연행으로 2백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탄광 60만명,군수공장 40만명, 토목공사 30만명, 금속광산 15만명, 항만공사 5만명, 군인 또는 군속자 15만명, 종군위안부 13만명(박경식 ‘제일조선인운동사’ p312)이 동원됐다.

 

이중 1940년 4월부터 11월까지 초세이(장생.長生) 탄광에 모집된 조선인은 480여명에 이른다. 당시 992명의 인부가 15만톤의 석탄을 생산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해저탄광이었다.

 

1942년 2월 3일 이른 아침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시 니시키와 해변의 바다 밑 초세이탄광에서 채광작업을 하다 해저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180여명이 산채로 갱도에 수장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희생자 136명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되어 온 남자들로 “탄 한 상자 더 캐고 죽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루 14시간 노동에 일당 2원을 받으며 일했다.당시 조선인의 목숨은 탄 한 상자보다 가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사고가 나기 한 달 전 탄광에 바닷물이 새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만 강제로 비번까지 밀어 강제 작업시켰다.
사고는 해안에서 1km남짓한 바다 밑에서 암반이 무너지면서 해저갱도에 충격이 가해져 물이 스며 들어 갱도가 무너지면서 발생했다.
물 위로 간신히 살아 올라온 생존자들을 일본인들이 다시 강제로 물속으로 밀어 넣어 많은 참사가 발생했다.

 

”바다위에 있는 피야(송풍관.숨구멍)에도 물이 들이치자 탄광의 공기가 빠지면서 거품이 하얗게 일면서 3일 동안 하늘을 향해 물기둥은 멈추지 않고 솟아올랐고, 니시키와 해변은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당시 추순덕(2006년 사망) 씨는 말했다.

 

이 사고로 모두 180여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136명이었다. 희생자중 한 사람은 기자의 조부이기도 하다.
6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나이 5세였던 기자의 부친은 탄광촌 인부 숙소(아리랑마을)에서 할머니와 4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난 2001년 참혹한 현장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부모님을 모시고 초세이 탄광을 다녀왔다.

부친은 해저탄광의 송풍구 역할을 하는 피야를 바라보며 해변을 거닐다 어릴 적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모래사장 위에 띄엄띄엄 있는 석탄을 매만지다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아버지~”를 목청 높여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파도소리 뿐이었다.

 

강제연행된 한국인 숙소인 아리랑마을과 당시 탄광에서 사용했던 채광장비인 렌턴과 삽, 마스크,수통, 대형 쇠솥 등이 창고에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우베시와 탄광회사 측에서 숙소와 창고를 일부 철거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추순덕씨는 2001년 2월 기자를 만나 “이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차가운 바다 밑에는 69년의 모진 비바람 속에 우뚝 서 있는 피야 밑으로 138명 탄광의 남자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 있다.
해저 탄광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한국정부는 하루 빨리 수습하여 고국으로 모셔 오길 희생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군청에 징집돼 부산 부두로 가는 조선인들

 

 

해저탄광에서 탄을 실어나르는 철로와 선박이 보이는 초세이탄광 현장

 

탄광 수중갱도 송풍구인 피야만이 바다 위에 그대로 떠 있다.

 

초세이탄광 현장에서 기자의 조부는 광복 66주년이 되었지만

해저 탄광에 아직 그대로 수장되어 있다.

기자의 부모님이 꽃을 던지며 고인이 명복을 빌고 있다.

 

출처 : 노무현대통령님의 가치와 정치철학 계승
글쓴이 : 순수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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