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 선장
2008. 8. 16. 15:56
노비출신 까레스끼의 항일운동

최재형은 1860년 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 최형백의 둘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9살이 되던 해 최형백은 기근과 봉건 지주들의 탄압을 피해 큰 아들 내외를 데리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 연해주 지신허에 둥지를 틀었다.
최재형은 2년간 형수 밑에서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식충이로 구박 받던 최재형은 결국 집을 나온다. 걷다 지친 그는 포시예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잠이 들었고 정박해 있던 상선의 선원들에 의해 발견된다. 선장 부부는 거지 행색이지만 최재형의 총명한 눈빛에 매료돼 그를 자신들의 항해에 동참시킨다.
최재형은 9년간 러시아 전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남부 해안 등을 항해하며 근대 문명을 온몸으로 체화한다. 1877년 정기 항해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무역업에 종사한 뒤 1882년에 연해주 도로공사에서 통역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납부하는 조달업자로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때부터 그는 동포 가족들이 살고있던 안치헤 마을을 찾아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주 한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1890년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한인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한인 촌락들이 생겨났다. 러시아 정부는 1895년 크라스키노 안치헤 마을을 중심으로 첫 한인자치기관을 만들고 최재형을 한인 자치 기관장인 도헌(都憲·volostnoi starshina의 번역어)으로 추대했다.
그가 살았던 마을을 방문했던 영국 탐험가 비숍(I. Bishop·1831~1904) 여사가 조선 국내와 아주 다른 얀치혜·지신허 등 교포 마을들의 ‘안전성과 법적 질서의 분위기’에 찬사를 보냈는데, 그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바로 최재형을 비롯한 양반의 횡포에 원한이 사무친 ‘천민 근대인’들이었다.
가정에서는 최재형이 부인을 ‘동지처럼’ 대해주고 권속들에게 거칠게 명령하는 일이 없는 등 평등의 풍토를 조성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장사꾼이었지만 고아원·학교· 빈민 한인의 구출에 크게 기부하는 등 ‘공공선’에의 애착이 강했다.
최재형이 이끈 의병부대는 안중근, 엄인섭 등의 지휘하에 1908년 7월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 홍의동을 공격해 100여명의 일본인 사상자를 냈다. 회령 근처 운성산과 부령읍 인근 배상봉에 주둔한 일본군도 크게 격퇴하는 등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최재형은 5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의 이름과 출신 등을 알고 있을 정도로 대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지도자였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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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을 이야기할 때 안중근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은 단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생존해 있는 최재형의 막내딸 엘리자베트의 회고록에 보면 “동의회 일원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에 앞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연해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을
적극 전개하던 그는 1920년 일본군의 대대적인 연해주 소개작전
때 붙잡혀 처형됐다. 그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글 : 연해주 신문,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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